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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신문] 박희재 교수, 기술 혁신과 생태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3-23
조회
1196


기술 혁신이란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삶의 양식과 범위를 급진적·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신석기 시대의 농업 혁명, 17-8세기의 산업 혁명, 그리고 21세기의 디지털 정보 혁명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기술 혁신의 수용 여부가 집단과 사회의 생존 문제에 직결된 역사적 선례를 본다면, 기술 혁신이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약 12000년 전, 인류는 신석기 농업 혁명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본격적으로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 사냥에서 사육과 유목으로 생활 방식을 혁신했다. 이로 말미암아 신석기 시대에는 더 많은 식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같은 도시 문명으로의 변화가 초래됐다. 그러나 이 신석기의 혁신을 모두가 수용한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구석기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신석기인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뒤쳐져 멸종하거나 노예가 되는 등의 형태로 신석기 체제에 편입된다.

18세기에 영국의 뉴커먼은 상업적 증기 기관을 최초로 개발해 탄광에 판매하기 시작했고, 증기 기관 수리 기술자였던 제임스 와트는 증기 기관이 더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도록 크게 개선하는 발명으로 특허를 출원한다. 그렇지만 그는 상업화와 마케팅에 실패해 거의 파산에 이르는 위기를 겪는데, 다행히 당시 성공적인 기업가였던 볼턴과 협력해 절약된 석탄 비용만큼만 비용을 나눠 받는 이른바 임대 마케팅 전략을 도입함으로써 상업적 증기 기관의 수를 급격하게 늘려갈 수 있었다. 이는 산업 혁명의 획기적인 동력원이 됐다. 스티븐슨은 증기 기관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해 육상 교통 혁명이 가능하게 했고, 아크라이트는 방적기를 개발해 직물 생산의 기계화와 산업화를 이끎으로써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끔 했다.

이런 기술 혁신이 파급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생태계가 필요했다. 당시 영국 중부 지방에는 혁신 기술을 보호받을 수 있는 특허 제도가 존재했고, 상업 자본주의와 해외 교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수백 개의 개인 은행들이 자리 잡고 있어 개발과 상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 생태계가 마련돼 있었다. 아울러 기술 교육 기관들이 존재해 산업 혁명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공급하는 생태계가 구축된 점 역시 산업 혁명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혁신 기술의 성공적인 수용을 위해서는 개발, 특허, 인력, 금융, 마케팅에 이르는 생태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기술 혁신을 성공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사례를 멀리 외국에서 찾을 필요는 전혀 없다. 16세기 초에 함경도 단천 은광에서 평민 감불(甘佛)과 노비 검동(儉同)은 당시 국제 결제 통화였던 은을 높은 수율로 제련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 즉 단천연은법(회취법)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반정으로 집권한 조정은 전조 연산군 시대의 것들 중 많은 부분을 적폐로 치부해 전국에 있던 은광을 축소·폐쇄하고 기술자들을 쫓아내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당시 조선의 물정을 정탐하던 일본은 이 혁신적인 은 제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선의 기술자들과 하급 관리를 몰래 만났고, 결국 은 제련 기술을 습득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발각되기도 했다는 기록을 보아 이런 은 제련 기술 습득과 유출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고, 드디어 일본은 이와미(石見) 은광에서 한반도에서 초청한 기술자 종단(宗丹)과 계수(桂壽)의 지도 아래서 은 제련 양산 기술을 도입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와미 은광이 연간 약 150톤의 은을 생산하면서 일본은 당시 전 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차지하는 세계 제일의 은 생산 국가가 됐고, 이는 포르투갈을 비롯한 대항해 국가들과의 국제 교역망에 일본이 편입되는 중요한 단초가 됐다. 이후 이와미 은광은 전국시대 말에 도요토미의 세력으로 편입되고, 도요토미는 여기서 생산된 은으로 군사와 조총을 대규모로 준비할 수 있게 돼 전국 통일을 마무리하고 조선 침략을 나섰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결국 세계적인 혁신 기술이었던 은 제련 기술은 조선의 단천 은광에서 개발됐지만, 정작 이 땅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일본으로 흘러가서 열매를 맺었다. 기회를 놓친 조선은 그로 인한 피해와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백성들이 감당하는 슬픈 역사를 지니게 됐다.

이런 사례는 혁신 기술의 연구·개발도 중요하지만, 상업화, 양산, 국제 교역으로 이어지는 기술 혁신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기술 혁신의 적극적인 수용과 이를 뿌리내리게 하는 생태계의 구축은 집단과 사회의 생존과 직결돼 있기에 참으로 중요하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 대학과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이 글은 2019년 10월 26일 네이버 열린연단에서 필자가 강연한 원고 ‘기술혁신의 수용’에서 인용 및 요약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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