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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희재 교수 "IMF때 1달러라도 벌려고 서울대 벤처 1호 차렸는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5-15
조회
1217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박희재 에스엔유프리시젼 대표의 '1달러'


대학원생들과 정밀 장비 만들어

교수 계급장 떼고 영업맨 변신… 첫 수출 대금 들어온 날 못 잊어


국내 업체들
장비 채택했지만 해외서 기술 인정받아 급성장

충남 아산시에 있는 에스엔유프리시젼(SNU Precision·SNU는 서울대의 영문 약자) 본사와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에 있는 회사 연구소에는 미화 1달러를 표구한 액자가 걸려 있다. 바로 우리 회사의 '보물 1'이다. 액자를 보면 다들 "세종대왕님이 들어있는 1만원짜리보다 미국 돈 1달러가 더 영험하냐"고 묻는다. 돈을 많이 벌자는 뜻에서 이 액자를 붙여 놓은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1달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돈이다. 우리 회사가 숱한 땀과 눈물을 흘린 끝에 처음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이기 때문이다. 1998년 내가 서울대 교수 신분으로 회사를 창업할 때 우리나라는 IMF 경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하루하루 벌어지는 상황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국고에 외화가 없어서 1달러의 가치가 2000원 넘게 뛰어올랐다. 알토란 같은 우리 기업들은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이러다간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은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던 금반지까지 내놓았다. 국비 유학생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교수까지 됐는데, 나는 무엇을 했는지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기술로 1달러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원생 3명을 데리고 서울대 실험실 벤처 1호로 에스엔유프리시젼을 세웠다.


박희재 에스엔유프리시젼 대표가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에 있는 연구실에서‘회사의 1호 보물’인 1달러 지폐 액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1달러는 2000년 처음으로 제품 수출에 성공하고 받은 대금에서 인출한 것이다. /김지호 객원기자


영국 맨체스터대 유학 시절 지도교수는 늘 "네가 연구한 기술이 산업에 어떻게 기여하느냐"고 물었다. 엔지니어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쓰려면 먼저 그 기술이 기업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회사에 전화를 걸고, 전시회에서 발로 뛰면서 내가 만든 기술을 소개했다. 창업을 위한 사전 훈련을 톡톡히 한 셈이다.

창업 후 처음 개발한 제품은 공작기계의 정밀도를 측정하는 센서였다. 표면에 레이저를 쏘거나 전류 흐름을 측정해 선반이 금속을 얼마나 정밀하게 깎았는지 알아내는 장비였다. 한 해에 10건 이상 산학 협동 연구를 하면서 기업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장비였다. 중소기업과 함께 연구·개발(R&D)에서 마케팅, 제품 브로셔 제작까지 기업의 전 과정을 다 경험해봤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현실은 달랐다. 여러 차례 국제 학회나 전시회에 나가 우리 제품을 소개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해외로 나갔다. 교수라는 계급장을 떼고 영업맨이 돼 우리 제품을 알렸다. 지성(
至誠)이면 감천(感天)일까. 드디어 2000 5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 학회 마지막 날 스웨덴의 자동차 부품 업체가 우리 제품을 사겠다고 했다. 스웨덴 현지로 날아가서 제품 설치까지 해주고 귀국하자 수출 대금이 회사 통장에 들어와 있었다. 당장 은행에 달려가서 1달러짜리 두 장을 출금했다. 본사와 연구소 액자에 들어있는 1달러가 바로 그 돈이다.

수출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규모가 작은 장비라서 수익은 미미했다. 새로운 돌파구는 LCD(액정디스플레이) 측정 장비로 잡았다. 2004년 도쿄에서 열린 LCD 전시회에 이 장비를 출품해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 시장을 뚫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창업 당시 동료 교수들이 십시일반 마련해준 자본금 500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이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그런데 도쿄 전시회에 참석하려면 제품 운송비만 2000만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피 같은 돈을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나와 회사 직원인 대학원생 3명은 꾀를 냈다. 100㎏이 넘는 장비를 분해한 뒤 각자 가방에 나눠 담아 들고 가기로 한 것이다. 수하물 무게 한도를 넘기지 않으려고 개인 휴대품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한 대학원생은 짐을 줄이려고 속옷을 여러 겹 껴입고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참가한 전시회에서 우리 제품이 호평을 받았고, 그해 일본에 LCD 장비를 수출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우리 회사는 2005년 코스닥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새로운 디스플레이로 각광받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기판 위에 형광 물질을 정밀하게 입히는 장비를 독자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일본 업체의 장비를 표준으로 채택한 것이다. 애써 개발한 장비가 무용지물이 될 위기였다.

우리 회사는 막 OLED에 투자를 시작한 중국에 눈을 돌렸다. 중국 업체에 시제품을 납품하고 직원의 4분이 1이 밤낮으로 매달려 양산(
量産)을 위한 공정 안정화 작업을 진행했다. 장비를 설치하고 오류를 사전에 잡는 과정은 몇 달씩 걸린다. 당시 결혼을 앞둔 한 여성 엔지니어는 양가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결혼식 일정까지 조정했다. 마침내 지난해 4월 그 중국 업체로부터 600억원 규모의 장비를 수주했다. 세계 최고라던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따낸 성과였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다른 회사에서도 주문이 이어졌다.

우리 회사는 이제 직원 250여명에 연 매출 1000억원의 회사로 성장했다. 매출의 80%는 수출에서 벌어들이는 것이 자랑거리다. 창업 멤버였던 대학원생 모두 박사 학위를 받고 회사의 연구소장, 생산본부장, 상무로 일하고 있다. 지금도 사무실에 걸려있는 1달러 액자를 바라보면 "네 기술이 한국 산업에 어떻게 기여하느냐"고 묻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기술보국(
技術報國)'의 정신을 가다듬는다.


['
국가 R&D단장' 박희재 대표는]

박희재(
朴喜載·53) 대표는 서울대 공대 기계설계학과 출신으로 포스텍 교수를 거쳐 1993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소 “엔지니어는 논문보다 산업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공대 대학원생이 기업의 기술 개발에 참여하면 논문 없이도 석·박사 학위를 줘야 한다”는 말도 자주 한다. 민관 합동의 공대혁신위원회는 지난달 박 대표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반영한 공대 혁신 방안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표는 지난해 4월에는 ‘국가 최고기술책임자(CTO)’로 불리는 산업통상자원부 R&D전략기획단장이 됐다. 그는 “당시 회사 대표를 유지해도 된다고 해서 단장을 맡았다”며 “대신 월급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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